박춘식 과장의 여유로운 일상

허먼 멜빌의 <모비딕> BEST서평...(인생과 항해... 그리고 시련)

박춘식 과장 2021. 5. 25. 13:46

오늘은 모비딕에 대한 필자의 맘대로 써보는 서평을 작성하겠다. 

먼저 모비딕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명작으로 평가받는 소설이다. 

현대 서사시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미국 소설의 고전 중 고전이자 명작으로 추앙받으며, 수많은 작가와 철학자, 심지어 대통령에게 영감을 주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내 개인적으로는 읽고나서 서평을 찾아보며 알게 된 명작이었다. 

주인공 이즈마엘의 눈으로 일어나는 모비딕을 잡으러 가는 서사는 잔잔하면서도 공포스러운 느낌을 주었다. 

에이허브 선장은 처음에는 공감이 되지 않는 열정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소설 후반부에 가면서 그의 삶이 인간의 운명론적 필연성에 묶인 존재라고 생각되면서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아무튼 내가 느낀 <모비딕> 감상평은 두가지이다.

 

 

첫째, 인생과 항해가 닮았다는 것이다.
이즈마엘이 여관에서 퀴케그를 만나는 과정부터 서사의 마지막이 되는 모비딕과의 싸움까지 읽으면서 필자는 인생의 험난함을 느꼈다.

<모비딕>의 중간중간 캐릭터나 사물을 설명할 때, 그것이 밟아온 세월이 만든 나이테를 보여준다.

에이허브는 잘린 다리를 대신하는 목발을 통해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왜 모비딕을 쫓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퀴케그는 몸에 문신이나 그을린 흔적을 통해 그가 바다 건너에서 왔으며 이즈마엘이 알고 있는 미국 문화권과는 다른 이국적인 느낌을 보여준다. 

피쿼드호는 항해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목재가 낡기도 하고 부서지기도 하며 바다의 풍파를 맞으며 변화한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여러 풍파를 맞으며 변화한다. 험난한 일을 겪으며 더욱 날카로운 성격이 되거나, 오히려 내면에 침잠하여 순응하는 성격이 되기도 한다. 

 

항해는 인생과 비슷하며 삶 안에서 나의 모습을 바꿔나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둘째, 신은 우리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모비딕>은 자연 그 자체의 현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즈마엘이 관찰자로서 태평양을 항해하는 피쿼드호에서 에이허브 선장, 스타벅, 피퀘그를 담담히 바라본다. 우리는 이즈마엘과 함께 관찰하며 나름대로의 정을 느낀다. 그러나 애착을 갖는 캐릭터들은 우리들의 마음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신은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와는 다르게 자연을 '현상' 그 자체로 놓아둔다. 우리가 예상하는 결말은 에이허브가 모비딕을 잡으면서 복수에 성공하고, 고된 생활을 하는 선원들이 승리의 포효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멜빈의 <모비딕>은 자연 그 자체를 관망한다. 모비딕은 선원들의 배를 산산조각내고, 자신의 말처럼 강할 것 같은 에이허브 선장까지 물의 심연속으로 사라지게 만든다.

 

신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단지 중도적인 입장에서 세상의 균형을 맞출 뿐이다. 누군가는 이러한 신을 냉담하고 할 것이며, 누군가는 신의 가혹함을 받아들일 것이다. 

 

아이티 지진 당시... 신은 우리에게 무관심하다.


아래는 모리스 블랑쇼가 오디세우스와 에이허브를 비교한 글이니 참고바란다.
확실히 에이하브가 모비딕과 만나는 것은 단지 멜빌의 책 속에서일 뿐이다. 그러나 이 만남이 비로소 멜빌로 하여금 그 책을 쓸 수 있게 해주었다는 것 또한 확실하다. 

 

이 만남은 그것이 일어나는 모든 면을 초월해서 사람들이 그것을 위치 설정하려고 하는 모든 시간을 초월한 만남, 이 책이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일어났다고 생각될 만큼 너무나도 압도적이고 엄청나며 독특한 만남인데 그것은 또한 작품의 미래 속에서 그에 상응한 일개의 대양이 된 한 작품이 체현하게 되는 저 바다 속에서 단 한 번만 일어날 수 있는 만남인 것이다.


에이하브와 고래 사이에서는 아주 애매한 방식으로 말하자면, 형이상학이라는 말로 형용할 수 있는 어떤 연극이 펼쳐지고 있는데, 같은 싸움이 세이렌과 오디세우스 사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이 연극이나 싸움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각 당사자는 자신이 전체가 되려하고 절대적인 세계가 되려고 한다. 

 

그리고 이것이 상대방의 절대적 세계와의 공존을 불가능하게 하는데, 어느 쪽도 이 공존이나 만남 이상으로 더 큰 욕망을 품고 있지는 않다. 에이하브와 고래를, 세이렌과 오디세우스를 동일한 공간 안에서 다시 연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오디세우스를 호메로스로, 에이하브를 멜빌로 만드는 은밀한 염원이다. 

 

바로 이것이 이 결합으로부터 생겨나는 세계를, 가능한 모든 세계들 가운데서 가장 위대하며 가장 무시무시하고 가장 아름다운 세계로 만드는 비밀스러운 염원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 세계는 한 권이며, 이 책 이외에 그 무엇도 아닌 것이다.


에이하브와 오디세우스 중에서 가장 큰 권력의지를 가진 자가 가장 분방하게 행동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디세우스에게는 아주 사려깊은 완고함이 있고 이것은 세계 지배로 귀결된다. 그의 교활함은 자신의 능력에 제한을 가하는 척하는 데 있다. 다른 힘과 대면하는 경우에 자신이 여전히 할 수 있는 것을 냉정하게 계산하여 추구하는 데 있다. 만약 그가 어떤 한도를 넘지 않고, 현실 세계와 세이렌의 노래가 그를 유혹하여 편력하게 만드는 상상적 세계간의 간극을 유지한다면 그는 전체가 될 것이다. 그 결과는 그에게는 일종의 승리이고, 에이하브에게는 일종의 암울한 패배이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일인데, 오디세우스는 에이하브가 본 것을 몇 번인가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들으면서도 완강하게 저항한 반면에 에이하브는 자신이 본 이미지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것은 한쪽이 변신을 거부했던 반면, 다른 쪽은 변신 속으로 빨려 들어가 거기서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련 후에 오디세우스는 예전과 똑같은 자신으로 되돌아 가고, 세계는 아마도 이전보다도 빈곤해졌지만, 보다 확고하고 확실한 것으로서 다시금 나타난다. 에이하브는 다시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멜빌 자신에게 세계는, 단 하나의 이미지가 주는 매혹이 그를 끌어당기는 저 세계 없는 공간으로 끊임없이 빨려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 블랑쇼, 도래할 책, 심세광 번역, 그린비, 21~23쪽